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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예술☆/[영화]감상하기

세상의 언어가 하나밖에 없었다면..-바벨-

by 메칸더방구뿡 2010. 7. 23.

바벨의 뜻-성경에 따르면 과거 인간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대홍수 이후 인간은 신의 재앙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신의 영역인 하늘에 맞닿는 거대한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다. 신은 인간에게 물로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는 무지개를 약속했으나 인간은 이를 믿지 못하고 거대한 탑을 쌓는다. 이에 분노한 신은 인간에게 재앙을 내린다. 그 재앙은 바로 소통의 불협화음. 언어의 분리였다. 탑을 건축하던 이들은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결국 바벨탑은 붕괴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언어소통의 분리,
인간과인간 언어소통의 분리에 대한 세계적 비판이다.


줄거리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네개의 다른 인간사의 이야기 <바벨>은 모로코 사막에서 울린 총성 한발로 영화를 시작한다. 자칼에게서 가축을 지키기 위해 구입한 라이플총을 들고 두 소년이 장난을 치더니, 멀리 지나는 버스까지 총알이 날아가는지 시험해보자며 총을 쏜다. 그러자 버스가 멈춘다. 그 안에 타고 있던 여행객 수잔(케이트 블란쳇)이 총에 맞고 쓰러지고, 남편 리처드(브래드 피트)는 어쩔 줄을 모른다. 한편, 리처드와 수잔이 남겨두고 온 자녀들을 돌보는 멕시코 출신의 가정부 아멜리에. 그녀는 지금 아들의 결혼식에 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녀 대신 아이들을 돌봐줄 보모가 오지 않는다. 결국 이 두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국경을 넘기로 하지만, 백인 아이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는 멕시코인에게 쏟아지는 건 의심의 눈길이다. 그리고 또 한편, 일본의 도쿄에서는 농아 소녀의 방황이 펼쳐진다. 또래들 사이에서 그녀의 콤플렉스는 커지기만 한다. 그러던 그녀는 아버지를 찾아온 형사에게 점점 관심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바로 모로코 사막에 총을 두고 온 전 주인이다. 각기 다른 대륙과 도시에서 일어나는, 그러나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들.

구성방식.

4가지의 다른 이야기의 조합.

모로코에서의 이야기 그리고 모로코에 여행온 수잔과리처드의 이야기 또 그들의 자녀들을 돌보는 멕시코 가정부의 이야기. 일본 도쿄에서 농아 소녀의 이야기.

이렇게 4가지의 이갸기가 계속 반복적으로 이어져 나간다. 처음에는 각자의 길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다가 총을 쏘는 장면에서 부터 모로코와 수잔리처드의 이야기가 묶여지기 시작한다. 다시 이야기는 진행이되가다가 리처드가 집으로 전화한통화를 하며 멕시코출신의 가정부와 리처드가 묶여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어느 정도를 가다가 과연 일본 도쿄의 농아 소녀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점이 든다. 거의 중반이 넘어섰을때 처음에 모로코에서 소년들이 쏜 총이 그 소녀의 아버지가 선물한 총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모든 이야기의 연결 고리가 걸리게 된다. 그 사건과 연관성 자체의 의미를 알아보자.


사실 일본의 이야기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큰 구심점을 한다기보다는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수단이다. 영화를 보며 느낄 수 있는 건 모로코 여자아이와의 특별한 연광성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이야기갈등을 바라보는 제3자의 시선을 대변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치에코의 이야기를 통해 크고 작은 소통의 부재를 2가지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청각장애의 여고생인 치에코(키쿠치 린코 역)는 세상을 시선으로 소통한다.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치에코는 결국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이다. 치에코에게 호감을 보이던 소년이 그녀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그 관심을 끊어버린다. 자신의 핸디캡으로 인해 그녀를 괴물취급 하는 사회와 사람들에게 그녀는 처절히 소통하길 원하지만 그것이 어떤 방법인지도 모르는 그녀는 자신의 맨몸을 이용하여서라도 인정되길 원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조사하러온 경찰관에게 옷을 벗고 그를 끌어안으려 하고 교복치마를 입고 팬티를 입지않는 행위들을 한다. 하지만 결국 사람들은 결국 그 와의 소통을 포기해버린다. 이는 영화가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는 지점을 대변하는 것인데 결국 이 영화는 소통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인종과 국가 같은 구분된 경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소통을 말이다.


치에코를 통한 소통을 이야기했다면 다른 하나는 위에서도 말했 듯이 전체적인 이야기를 3자의 시선으로 마무리를 짓는 듯 한 아주 커더란 주제가 있다. 이 세계가 미약하지만 어떤 가느다란 하나의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음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마치 도미노가 넘어지듯 모로코에서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 도쿄에까지 미치는 영향. 그것이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TV뉴스를 통해서 보게 되는 그 현상안에서도 우리는 그런 사실을 접하고 영향 받게 되는 것이다. 단지 먼 이국에 있는 제3자들에게 그런 현상은 그저 흘러가는 뉴스거리일 뿐이다. 이라크에서 누가 죽어가도 그것은 그 나라의 현실일 뿐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는 화면속의 정경이 되고 입에 오르다가도 금방 잊혀지는 일이 될 뿐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써 자신과 무관한 소통에 관심을 지니지 않는 보편화 된 이기심이다.

바로 이점에서 이영화의 전제라고 할수 있는 소통의 부재로 인해 빚어지는 인간들의 범세계적 문제점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수잔과 리처드 이야기

타 나라로 여행을 왔다가 장난으로 쏜 총에 맞는 수잔. 하지만 그들은 소통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치료 또한 받지를 못한다. 한 작은 마을에서 구급대의 치료를 기다리지만 한 생명이 생사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상황에서도 인간들은 국경의 문제를 논하고 절차를 따진다. 인간의 존엄성은 교감되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남긴다. 우리는 어째서 국경을 나누고 민족이라는 울타리를 세우는가. 과연 인간이 인간으로써 하나의 교감을 나누는 건 불가능한 일인가. 이 영화는 그 인간이라는 명제 그 자체의 동질성을 반하는 우리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의 불행을 업신여기며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기적인 울타리 속에서 영역밖의 인간을 공존이 아닌 경쟁과 배척으로 바라본다. 인간의 존엄성은 알량한 민족과 국가라는 인위적 경계에 의해 짓밟힌다.

또 한번, 아내를 수술실로 들여보낸 리처드(브래드 피트 역)는 집에 전화를 하며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쏟어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울타리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인간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등 돌리고 국가라는 울타리를 세워 그 안에서 안주해야만 한다.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결국 타인에 대한 경계로 깊어간다. 우리는 그렇게 세계의 수많은 인간들과 하나의 세상을 살고 있지만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자신의 국가안에서의 소통만을 할수밖에 없는 환경과 그들 자체도 그 밖에서의 소통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멕시코 가정부 아멜리아 이야기다.

아멜리아는 자신의 아들 결혼식을 위해 국경을 넘어서 간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을 그냥 둘수 없어서 아이들을 데려가는 결정을 한다. 결혼식을 마치고 조카의 차를 타고 오는 길 거기서 그들은 국가경비병들에게 검문을 받는다. 이번에는 다른때와 다르게 분명히 소통을 하지만 멕시코와 미국 국경에서 벌어진 파국은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지 못한다. 여기에 바로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했다. 절대적 힘을 가진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의 소통 관계에는 인간대 인간의 소통이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는 절대적인 굴욕과 모욕적인 소통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모욕적인 검문에 참지 못한 산티아고가 시동을 걸고 내달리는 순간 상황은 악화로 치닫는다. 그리고 아멜리아와 아이들은 한 곳에 버려진다. 이 부분에서는 그 국가적 소통의 피해자는 그들이 아닌 제3자라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총을 가지고 놀다가 버스를 향해 장난을 친 형제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는 이 형제가 장난으로 쏜 한방의 총알로 시작이 된다.

마치 성경 바벨에서 신의 재앙을 모르고 무심코 쌓은 바벨탑의 이야기처럼 그들 역시 무심코 한 행동으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의 단점으로 지적되었던 부분과 감독의 방향 및 의미를 알아보았다.

위에서 말했지만 이들에게 던저진 총 한자루로 인해 모두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장난삼아 총을 쏘던 모르코 소년들은 테러리스트로 오인받아 경찰의 추적을 받고, 멍한 시선으로 이곳을 관광하던 수잔은 총에 맞아 신음한다. 어머니의 자살을 목도한 농아 소녀는 총의 출처를 묻는 경찰들로 인해 아버지마저 자신의 곁을 떠날까봐 노심초사하고,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수잔 부부로 인하여 애들을 멕시코로 데려간 아멜리아는 국경 경비대에게 아이들을 유괴한 불법체류자로 오인받는다. 감독은 이 서로 다른 에피소드를 무작위로 병치시키면서 소통 부재의 불안과 소외감을 묘사한다.

누이의 옷 갈아입는 것을 훔쳐보는게 유일한 취미인 양치기 소년들이나, 서로에게 의지할 수 없는 미국인 부부, 그리고 자신의 신체적 불구로 인하여 세상과 단절되었다고 느끼는 농아 소녀, 자신의 청춘을 먼 이국땅에서 보내야 했던 멕시코 아줌마를 보면서 관객들은 그들과 더불어 정신적 고립감을 경험하게 된다. 감독은 더 나아가 개인의 소외감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문화의 갈등이나 인종간 정신적 단절을 그림으로써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삶의 단면들이 인간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이때 이들에게 던져진 총 한자루는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한 은유나 다름없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 모두가 고통받는 피해자일 뿐이다.

물론 이 모든 사건이 벌어지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필연적으로 위대한 아메리카(?)가 개입된다. 영화에는 여러 국가가 등장하지만, 사건이 벌어진 에피소드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미국이라는 나라를 중심으로 미국-모로코, 미국-일본, 미국-멕시코의 관계 설정에 불과하다.

이 위대한 나라는 총상을 입은 자국민의 안위보다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향해 총구를 겨눈 테러리스트 색출에 혈안이 된다. 자국민을 어떻게 안전하게 치료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감히 미국을 공격했느냐가 중요 사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미국에게 있어 약소국들은 언제나 준비된 가해자가 되는 셈이다.

앰뷸런스를 기다리는 리처드 부부의 초조함과는 달리 모로코 정부의 테러 가능성을 주장하며 헬기를 보내겠다는 미국 대사관의 태도나, 테러를 인정할 수 없다며 헬기 착륙 허가를 해 줄 수 없다는 모로코 정부의 대응은 이런 현실적인 모습을 투영한 결과라 더없이 당황스럽고 씁쓸하다. 안과 밖 소통의 단절을 견뎌야 하는 절망의 시대지만, <바벨>의 위대한 점은 아무리 언어와 환경이 달라도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점.

리처드 부부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모로코 가이드가 그렇고, 고통에 신음하던 수잔에게 대마초를 물려주던 할머니의 따뜻한 시선

황량한 사막에서 리차드-수잔 부부의 자녀를 포기하지 않던 멕시코인 유모 아멜리아가 그렇고, 농아 소녀 치에코의 오열을 따뜻이 안아주던 일본인 수사관이 그렇다.


감독은 휴머니즘이 빛을 발하는 것은 어둠을 통해서 빛을 찾고, 절망의 현실을 노래하면서도 끝까지 희망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데 있다.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만국 공통어인 셈이다. 감독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그치지 않고 좀더 구체적인 가족사랑이라는 것으로 시나리오를 구성한다. 이거에 대해 알아보자

감독은 이런 참혹하고 암담한 현실을 견뎌내기 위한 대안으로 과감하게 가족사랑이라는카드를 꺼내든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밥을 같이 먹고 한 지붕 아래서 얼굴을 맞대고 잠을 잔다는 것 외에 오늘날의 가족 구성원들을 연결시켜주는 고리는 없다.

가족이라는 구성원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듯 하면서도 실상은 아는 게 전혀 없는 가장 모호한 집단이 바로 가족이 되어 버린것이다.

<바벨>의 처음도 역시 마찬가지로 가족간의 불협화음에서 출발한다.

양치기 소년 유세프와 아흐메드의 경우 툭하면 대화 보다는 주먹이 먼저 날아오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가진 듯 하고(부자관계), 리처드-수잔 부부는 아이를 잃은 슬픔과 서로에 대한 원망으로 자칫 그 관계가 해체될 위기에 처해있다.(부부관계)

농아 소녀 치에코는, 청각 장애라는 신체적 핸디캡과 더불어 엄마의 자살 이후 심지어는 아빠에게 마저 소통의 문을 닫아버려 그 관계가 서먹하기만 하다.(부녀관계)

치에코의 파격적이고 극단적인 육체 노출씬도 아버지의 관심을 끌려는 치기어린 반항심으로 이해해야 하는게 아닐까? 하지만 절망의 나락에서 손을 내민 건 다름아닌 그들의 가족이었다. 팬티에 오줌을 지렸다는 창피한 고백도 가족이라 가능하고 국가와 이웃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부인이기 때문에 살리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설사 자식이 잘못했어도 그들을 살리기 위해 삶의 터전에서 도주를 결심하는 것도 아버지라 가능하고, 형과 아버지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판단되기에 유세프는 자수를 결심할 수 있는 것이다.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강제 추방당했을 때도 역 앞에서 기다려주는 것도 가족이었고, 자살을 결심한 딸의 손을 말없이 잡아준 것도 그녀의 가족이었다..

이렇듯 가족의 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직까지 유효한 셈이다. 누가 뭐래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공통의 언어는 '가족의 사랑'임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바벨 영상 기법.

사실 <바벨>의 경우 리얼리티를 강조하기 위하여 영화적인 장식들을 철저히 배제한 까닭에 조금은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바벨>에서의 지루함은, 재미가 없어 그런게 아니라 막막한 세상을 견디며 살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삶이 너무나 우리와 닮아 느끼게되는 '짜증'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지루함은, 또 감독의 촬영 기법과도 맞닿아있다. 감독은 서두에서 언급했다시피 롱-테이크, 클로즈-업을 주로 사용하면서 대상에 밀착하는 촬영을 주로 사용한다. 그러다보니, 극적인 진행 보다는 등장 인물의 행동으로 인하여 또 다른 이야기를 유출해 내야하는 관찰력과 집중력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멕시코 유모 아멜리아의 경우 파티에 입고 나갈 빨간 드레스를 갖고 딸고 정담을 나눈다. 그리고 중간 중간,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아저씨와 정사씬을 담는다.

사실 이런 화면은 이야기의 전개와 거의 연관이 없는 불필요한 화면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 화면이 없었다면 아멜리아가 '청춘에 대한 애착'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치에코의 경우 클럽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던 남자가 친구와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 실망해서 돌아 나오는 길에 중간 중간 사운드가 끊겼다 이어지는 화면을 보여준다. 그건 아마도 세상과의 단절을 표현하려 했던 감독의 의도였을텐데...이처럼 <바벨>은 숨겨진 여백이 많아 그것을 얼마나 많이 발견하는가에 따라 감동이 달라질 수도 있다.

따라서 등장 인물들의 대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롱 테이크로 담겨지는 그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는게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바벨>에서는 특별한 영화적 장치 없이도 인상 깊었던 장면들이 몇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건 등장인물들의 '포옹'이다. 리차드-수잔 부부의 포옹, 아멜리아의 아들과의 포옹, 그리고 치에코와 수사관의 포옹등 모든 에피소드의 종극에는 거의 포옹으로 그 절망감을 해소하려 하고 있다.

<바벨>은 서로 다른 세계의 충돌을 보여주는 영화다. 여행, 혹은 모험이라는 모티브는 고립된 현대인을 강제적으로 낯선 세계와 맞부딪치게 만드는 하나의 방식이다. <바벨>에서 인물들의 여행은 참혹한 세계의 진실을 다시금 깨닫게 만드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소통과 단절, 이해와 오해라는 두 주제가 명백하게 부각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